전통과 생계, 그리고 예의... 무에타이는 어떻게 태국인의 삶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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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투기 그 이상 - '팔각의 예술'로 불리는 이유
무에타이를 '팔각의 예술'이라 부르는 데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무에타이는 주먹, 팔꿈치, 무릎, 정강이와 발까지 신체의 여덟 부위를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는 격투기다. 각 부위는 거리, 상황, 타이밍에 따라 전략적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팔꿈치는 근거리에서 강한 타격을 주고, 무릎은 클린치 상황에서 복부나 얼굴을 노리는 데 효과적이다.
즉, 무에타이는 단순히 '많이 때리는 기술'이 아니라, 신체를 정교하게 운용하는 리듬과 거리감의 예술이다. 여기에 음악, 전통 의식, 상징적인 동작이 더해지며 하나의 무용 같은 격투기가 된다. 그래서 무에타이는 싸움이면서도 공연이고, 무술이면서도 문화다.
◇ 무에타이, 태국 사람들의 삶이자 영혼
무에타이는 태국에서 단지 싸움 기술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무에타이는 전통이자 문화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출세의 사다리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생계 수단이다. 링에 오르는 선수들 중에는 10대 초중반의 아이들도 있다. 이 어린 파이터들은 시골 마을에서 올라와 체육관에서 숙식하며 훈련하고, 실제로 이 경기에서 받은 상금으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한다.
경기장은 단순한 스포츠 아레나가 아니다. 링을 바라보는 관객들 사이에는 가족을 응원하러 온 부모, 체육관 동료, 지역 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응원은 뜨겁고, 분위기는 진지하다. 일부 관객은 경기에 조심스럽게 돈을 걸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선수들의 기술과 열정, 그리고 링 위에서 펼쳐지는 진짜 무에타이의 아름다움을 즐기러 이곳에 온다.
태국의 로컬 경기장에서는 경기 내내 전통 악기 연주가 이어진다. 피리 소리와 북소리는 선수들의 움직임과 호흡에 맞춰 리듬을 만들어내고, 관중의 손짓과 함성마저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무에타이는 단순한 격투기 경기가 아니라, 하나의 의식이고 문화다. 정성과 몰입이 깃든 진지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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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타이의 진가는 경기 시작 전부터 드러난다. 선수들은 경기를 앞두고 '와이크루(Wai Khru)'라는 전통 예식을 치른다. 링 위에서 천천히 몸을 풀며 스승과 부모, 조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 퍼포먼스는 단순한 예열이 아니다. 한 명의 무에타이 선수가 되기까지 자신을 키워준 공동체 전체에 감사의 마음을 드러내는 무대다.
이 춤이 끝나고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되면, 무에타이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빠르고 예측할 수 없는 킥, 정확한 팔꿈치, 타이밍을 재는 몸싸움, 그리고 숨을 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무릎 공격. 무에타이는 단순한 맨몸 격투가 아니다. 몸 전체를 하나의 무기로 사용하는 계산된 전술 싸움이며, 동시에 본능에 가까운 감각의 예술이다.
재미있는 건, 무에타이 선수들은 싸움이 끝나고 나면 서로를 꼭 안고, 스승에게 절을 올리며 경의를 표한다. 경기는 격렬하지만, 그 끝에는 항상 존중과 예의가 있다. 그 점이, 이 격투기가 수백 년 동안 '문화'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 관람만으로는 부족하다면? 여행자를 위한 '무에타이 원데이 클래스'
무에타이에 흥미가 생긴 사람이라면 단순한 관람을 넘어, 직접 링 위에 올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요즘 방콕, 치앙마이, 푸껫, 그리고 파타야 등지의 체육관에서는 여행자를 위한 '무에타이 원데이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실제 선수들이 훈련하는 체육관에서 기본 자세부터 발차기, 샌드백 훈련까지 체험할 수 있으며, 전문 트레이너가 직접 가르쳐주는 게 특징이다.
필자는 파타야 외곽에 있는 한 체육관을 찾아가 간단하게 체험해봤다. 처음엔 줄넘기로 몸을 풀고, 스트레칭을 한 뒤 무에타이 기본 스탠스와 펀치, 킥을 배웠다. 몇 번 킥을 날렸을 뿐인데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간단한 동작조차 리듬과 타이밍을 맞추는 게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하지만 강사와 눈을 마주치며 샌드백을 찼을 때의 짜릿함은 잊을 수 없다.
수업이 끝나면 실제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기념사진도 함께 찍을 수 있다. 운동과 문화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무에타이 클래스는 요즘 태국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링 위에 서는 순간, 관중석에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무에타이의 매력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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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무에타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관광지에서는 이를 상업적으로 포장한 '쇼 무에타이'가 늘어나고 있다. 파타야 같은 유흥지 거리에서는 쇼 형태의 무에타이 공연을 흔히 볼 수 있다. 링 옆에서는 호객꾼이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진짜 무에타이야, 싸게 볼 수 있어!"라며 티켓을 권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입장하면 사진 촬영 비용 등 갖가지 추가 비용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진짜 무에타이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규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때로는 경기라기보다 연출된 퍼포먼스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태국 무에타이의 정신, 즉 '존중'과 '의식'이 빠진 무에타이는 결국 소비용 쇼일 뿐이다.
진짜 무에타이를 보고 싶다면, 현지 체육관이 주최하는 정규 경기나 룸피니 경기장(Lumpinee), 라차담넌 경기장(Rajadamnern) 같은 공인 경기장을 찾는 것이 좋다. 무에타이의 진면목은 그들의 땀과 숨, 그리고 의식 속에 담겨 있다. 싸움만 보고 끝내기엔, 이 종목은 너무 깊다.
◇ 세계로 뻗어가는 전통, 그리고 여전히 살아 있는 태국의 원형
최근 무에타이는 종합격투기 무대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쓰이고 있다. 킥과 클린치, 팔꿈치 사용이 가능한 무에타이 기술은 현대 격투기에서 실전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전 세계의 파이터들이 태국을 찾아 무에타이를 배우고, 각국의 체육관에서는 무에타이를 접목한 피트니스 수업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글로벌 무에타이'와 달리, 내가 태국에서 본 경기장은 여전히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선수들은 아직도 스승의 손에서 직접 발목을 감고, 일부는 행운의 부적을 지니며 링에 오른다. 전통 음악, 리듬, 사람들의 숨결까지 -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이 무대는 태국의 정서를 가장 뜨겁게 느낄 수 있는 현장이었다.
한때는 단순한 '이국적인 격투기'쯤으로만 생각했던 무에타이. 하지만 이제는 그 속에 담긴 삶의 무게와 철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싸움 하나에도 예의를 갖추고, 움직임 하나에도 공동체의 마음을 담는 스포츠 - 그게 바로 태국의 무에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