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형찬기자의 대학로 오디세이] 17년의 웃음과 반전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api2.asiatoday.co.kr/kn/view.php?key=20250513010005740

글자크기

닫기

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5. 14. 08:59

대학로를 지켜온 블랙코미디 '죽여주는 이야기'
가족이 만든 기적의 무대, 450만 관객과 함께한 살아 있는 창작극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삶을 건네는 연극… ‘남자 마돈나’의 귀환으로 다시 도약
외부
17주년을 맞은 블랙코미디 연극 '죽여주는 이야기'를 보기 위해 대학로 공연장 앞에 긴 줄을 선 관객들.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작품의 변함없는 인기를 실감케 한다. / 사진 스튜디오틈(주)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죽음을 소재로 웃음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것은 단지 역설적 유머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자살과 안락사, 살인청부라는 무거운 키워드를 정면에서 다루면서도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내고, 그 웃음을 다시 깊은 여운으로 되돌리는 연극. 블랙코미디 연극 '죽여주는 이야기'가 15일 무대에 오른 지 꼭 17주년을 맞는다.

2008년 대학로에서 첫 막을 올린 이 작품은 흔히 말하는 '대학로 스테디셀러'의 교과서 같은 존재다. 단순히 오래 공연했다고 해서 스테디셀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긴 세월 동안 관객과 호흡하고, 시대의 감각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진화해온 작품만이 그러한 이름을 얻을 수 있다. '죽여주는 이야기'는 그 상징성을 스스로 증명하며 어느덧 누적 관객 450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단일 연극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수치이며, 수많은 연극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대학로에서 이 공연이 지닌 저력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의 출발점에 '가족'이라는 키워드가 있다는 것이다. 제작과 기획, 연출을 형제들이 함께 맡고, 막내가 배우로 무대에 오르는 진정한 '가족 창작극'이다. 삼형제가 작품의 기틀을 잡고 지속해온 구조는 연극계에서도 보기 드문 협업 방식이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기묘한 죽음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 작품의 밑바탕에는 가족의 결속과 사랑이라는 근본적인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그 진정성이 고스란히 관객에게도 전달되었기에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공연장
블랙코미디 '죽여주는 이야기'의 한 장면. 죽음을 둘러싼 세 인물의 기묘하고 유쾌한 대화가 관객의 웃음과 긴장을 동시에 자아낸다. / 사진 스튜디오틈(주)
'죽여주는 이야기'는 세 인물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자살 사이트를 운영하며 '최고의 죽음'을 서비스하는 회장 '안락사', 그에게 죽음을 의뢰하러 온 미스터리한 여인 '마돈나',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순진무구한 살인청부업자 '바보레옹'. 이 세 인물은 기괴하면서도 유쾌한 상황 속에서 마치 퍼즐처럼 맞물린다. 관객은 처음엔 혼란에 빠지지만, 점차 이들이 만들어내는 블랙코미디의 리듬에 몸을 맡기게 된다.

이 작품이 지닌 또 하나의 큰 매력은 '다회차 관람'을 유도하는 캐스팅 구조다. 한 역할에 열 명이 넘는 배우가 돌아가며 무대에 오르며, 조합에 따라 매 회차 다른 인상과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같은 대사와 장면 속에서도 배우가 바뀌면 공연의 질감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번 안락사는 누구지?', '오늘의 마돈나는 어떤 느낌일까?'라는 궁금증 속에 또 다른 회차를 예매한다. 이처럼 작품 그 자체가 연기 실험의 장이자 관객 참여형 경험의 공간이 되는 셈이다.

특히 이번 17주년에는 특별한 시도가 예고돼 있다. 바로 2008년 초연 당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던 '남자 마돈나' 캐릭터의 귀환이다. 성별 반전을 통해 불편함과 웃음, 위악과 매력을 동시에 선사했던 이 실험적 시도는 이번에도 색다른 충격을 안길 것으로 보인다. 무대 위 젠더의 전환은 단순한 설정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 삶의 무게를 나누는 방식, 그리고 관객의 고정된 시선을 깨뜨리는 작업. '죽여주는 이야기'는 그런 작업을 17년간 쉬지 않고 이어온 공연이다.

작품에 참여한 배우들의 면면 또한 다채롭다. 정승환, 정홍재, 유혜성, 이주영, 류종현, 홍지혁 등 대학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배우부터, 유튜브와 무대를 넘나드는 박준용, 김찬호 같은 멀티 아티스트, 그리고 이번 공연을 통해 새롭게 대학로에 얼굴을 알리고 있는 배우들까지 총망라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화려한 캐스팅'이라는 의미를 넘어, 이 공연이 새로운 배우의 발굴과 성장의 터전이 되어왔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김영대, 현봉식 등 지금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배우들도 이 무대에서 데뷔했다.

17주년을 맞아 제작진은 다양한 기념 이벤트도 준비했다. '가정의 달'인 5월 한 달간 평일 1만6천 원, 주말 1만8천 원에 관람할 수 있는 특별 할인과, 5월의 주요 기념일인 근로자의 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리고 17주년 당일인 15일에 적용되는 '목요 이벤트 할인'을 통해 1만5천 원에 예매할 수 있다. 대학로뿐 아니라 대구 송죽씨어터에서도 동시 공연이 진행 중이라는 점은 이 작품의 대중적 확산력을 다시금 입증해준다.

제작사는 "관객분들의 지속적인 응원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며 "앞으로도 더 많은 배우들이 '죽여주는 이야기'를 통해 무대를 경험하고, 관객과 호흡하는 연극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연극 '죽여주는 이야기'는 사회에 대한 공포, 두려움, 실망과 좌절로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지만, 현실 속에서 삶에 대한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 이야기의 방식은 블랙코미디고, 장르는 연극이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의외로 따뜻하다. 세상의 모순과 슬픔을 유쾌하게 건너는 이 이야기의 여정은, 아마 앞으로도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전형찬 선임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