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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서 드러나는 청춘의 고립과 생존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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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8. 15. 21:10

연극 '청춘판타지' 리뷰
거대한 흐름 속 작은 존재로 남은 이들의 고독과 연대
불안정함을 껴안고 써 내려가는 청춘의 자기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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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연극 '청춘판타지'는 그 제목처럼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 담아낸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청춘들의 불안과 공허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마법과 몬스터가 등장하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은 거대한 모험담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 앞에서 무너지는 이들의 나약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용기에 관한 조용한 기록이다. 이 작품은 웅장한 전투 대신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와 관계의 균열에 집중하며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작품은 판타지라는 형식을 빌리지만, 그 안에서 전개되는 사건과 감정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무대는 복잡한 장치를 배제한 단순한 구조로 구성되었으나, 조명과 배우들의 움직임, 오브제를 정교하게 활용해 몽환적인 세계를 구현한다. 그러나 그 몽환은 달콤한 도피처가 아니라, 현실을 투영하고 증폭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주인공들이 맞닥뜨리는 '퀘스트'는 세상을 구하는 영웅담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 깊게 자리한 두려움과 불안을 마주하는 여정이다. 마법이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인물들은 한 번 더 부서지고, 그 파편을 스스로 주워 다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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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신인류
연출 의도 역시 여기에 맞춰져 있는 듯하다. 제작진은 관객이 무대 위 인물들을 '이야기 속 캐릭터'로만 보지 않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축소판으로 느끼길 바란다. 그래서 대사는 감정의 극단을 드러내기보다, 일상 속에서 무심히 흘러나오는 말투와 호흡을 닮았다. 판타지 세계의 비현실적 설정과 이 자연스러운 대화가 충돌할 때, 관객은 오히려 그 간극에서 날카로운 현실감을 느낀다. 이는 '청춘판타지'가 단순히 판타지 장르의 연극이 아니라,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는 사회극의 성격을 띠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대 위 장면들은 게임적 문법을 차용해 구성되었지만, 이는 흥미를 끌기 위한 장식이 아니다. 청춘이 사회 속에서 인정과 기회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험과 실패를 거쳐야 하는지를 은유한다. 그러나 게임과 달리 이 세계에는 '재시작'이 없다. 실패는 그대로 쌓이고, 상처는 흉터로 남는다. 그럼에도 인물들이 다시 움직이는 이유는, 누군가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길을 끝까지 가기 위함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관계의 변화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기대지 않던 인물들이, 각자의 약점을 드러내며 점차 연결된다. 이 연결은 단순한 우정이나 사랑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의 목표나 이해관계보다 더 깊은,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작품은 이를 통해 청춘의 연대를 그린다. 그러나 이 연대는 이상화되지 않는다. 서로를 구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책임과, 때로는 함께하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배경으로 깔린 음악과 조명은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무대는 전투나 위기 장면에서도 과도하게 감각을 자극하기보다, 관객의 시선이 인물에게 집중되도록 구성돼 있었다. 빛과 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확장되기보다 절제된 상태를 유지하며,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이 더욱 뚜렷하게 전달됐다. 일상의 대화나 고요한 순간에서는 무대가 조금 더 개방적이고 여유롭게 느껴져, 그 장면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자연스럽게 짐작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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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신인류
'청춘판타지'는 개인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그린다. 전통적인 판타지 서사에서 주인공이 세계의 중심에 서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의 인물들은 거대한 흐름 속의 작은 존재로 남는다. 세상은 그들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무심히 흘러가고, 그 속에서 인물들은 자기만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이는 오늘날 청년들이 느끼는 구조적 소외와 겹친다. 취업, 주거, 관계 등 일상의 과제 앞에서 개인의 노력은 종종 무력하게 느껴지고,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자기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행위가 곧 생존이자 존재의 증명이라는 메시지가 작품 전반을 관통한다.

무대 위 판타지 세계의 규칙은 불합리하며, 때로는 이유 없이 인물들을 시험에 빠뜨린다. 예측할 수 없는 사건과 불공정한 조건 속에서, 그들은 언제든 발을 헛디딜 수 있는 경계 위에 선다. 이 구조는 오늘날 젊은 세대가 맞닥뜨리는 현실을 은유한다. 불안정한 노동 환경, 치솟는 주거 비용,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속에서 삶은 언제든 균형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인물들은 그 불안정함 속에서도 스스로를 단련하며, 살아남는 법을 익혀간다. 이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함을 전제로 한 생존의 기술을 재정의하는 과정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들이 맞이하는 결말은 화려하지 않다. 세계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물들은 그 속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고, 그 변화에 의미를 부여한다. 관객은 이 모습을 보며, 완벽한 승리보다 지속 가능한 걸음을 택하는 용기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된다.

'청춘판타지'는 판타지 장르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속은 현실의 무게로 가득하다. 그것은 청춘이 감당해야 하는 상실과 성장, 그리고 끝내 포기하지 않는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이 남기는 여운은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어떤 세계에서, 어떤 규칙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묻게 하는 날카로운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무대 위에서 내려간 조명이 꺼진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는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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