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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AP통신과 현지매체에 따르면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전날 홍콩을 깜짝 방문해 완차이 지구에서 해외에 거주하는 필리핀인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과 그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은 오는 5월 12일 필리핀에서 열릴 중간선거를 앞두고 소속 정당의 후보자들을 위한 지지 연설에 나서고 있다. 이날 홍콩 연설 일정은 사전에 발표되지 않았다.
이날 연설에서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ICC가 자신의 체포영장을 발부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를 언급했다. ICC는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2016년부터 2022년까지 불법 마약 단속 과정에서 경찰과 무장 세력에 의해 발생한 대량 학살을 조사하고 있다. '초법적 처형'으로 묘사되는 단속 과정에서 수천 명의 용의자가 사망했으며, 대부분 빈곤층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내 죄가 무엇이냐" 반문한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나는 내 임기 동안 필리핀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평화와 평온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체포가 내 삶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다. 체포되어 감옥에 가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말했다. 그는 연설 도중 군중들에게 자신의 기념비 건설을 위한 소액의 기부를 부탁하며 "총을 든 내 모습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AP통신은 익명을 요구한 필리핀 정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오는 12일 마닐라로 귀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홍콩에 좀 더 오래 머물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홍콩행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홍콩을 통치하고 있는 중국때문이다. 2002년 집단학살·전쟁범죄·반인도적 범죄 등에 대한 최후의 수단으로 설립된 ICC는 국가가 자국 영토에서 범죄를 기소할 수 없거나 기소하지 않으려 할 때 개입한다. 125개국이 ICC의 설립 근거인 로마규정을 비준했는데 중국은 이에 서명하지 않았고, 영장이 발부된 사람이 자국 영토에 있으면 체포해 법원에 넘길 가입국의 의무도 지지 않는다.
현재 필리핀 정부는 ICC의 체포영장 발부와 집행에 협조하겠단 입장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ICC가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구금을 요구할 경우 필리핀 법 집행기관이 전면적으로 협조할 의무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이 루이스 필리핀 공보장관도 기자들에게 보낸 성명을 통해 "ICC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두테르테 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는 소식을 접했다"며 "정부는 모든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기반인 필리핀 남부 다바오시의 국제공항에는 보안 강화를 위해 경찰 병력이 추가로 배치됐고 새 검문소도 설치됐다. 필리핀 경찰은 이번 조치가 "비상 상황 발생 시 법 집행 기관이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라고 밝혔다.
현지 매체 마닐라타임즈는 "최소 7000명의 경찰 병력이 동원돼 항구와 공항을 포함한 전국의 주요 입국 지점을 지킬 것"이라 보도했다. 이는 지난해 예수그리스도왕국(KOCJ)의 창립자인 아폴로 키볼로이를 체포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력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라고 매체는 덧붙였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재임중이던 지난 2019년 ICC가 두테르테 정권이 대량학살에 책임이 있다고 발표한 데 반발하며 ICC 탈퇴를 강행했다. 하지만 ICC는 필리핀이 회원국이었을 때 저지른 범죄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6년 7월부터 '마약 무관용 원칙'을 내세우며 마약 사범을 대거 잡아들였다. 마약 복용자·판매자가 투항하지 않으면 즉각 총격을 가해도 좋다며 경찰에 면죄부를 주기도 했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이 과정에서 3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필리핀 정부의 공식 집계는 약 7000명이다.